『난중일기亂中日記』: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陣中日記

Nan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난중일기』 속 이순신의 면모

이순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에 대해 평가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일성록』 같은 관찬 사료뿐만 아니라 각종 문집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많은 이들이 이순신의 업적과 공로를 칭송하고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중략)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위에 제시한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순신을 평가한 부분이다. 그의 인성과 공로에 대한 찬사,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다 펴지도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드러난다. 다른 사료에서도 실록과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업적을 평가하고 칭송하고 있다. 이순신과 가까운 사이였던 류성룡柳成龍은 자신의 저서인 『징비록』에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수양하고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타인에 의한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이순신의 면모를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남긴 『난중일기』를 살펴봐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7년간 작성한 진중일기이다.

1592년 1월 1일부터 작성된 일기는 전쟁의 혼란을 정면에서 겪었던 이순신이 당시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전쟁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난중일기』는 전쟁의 상황을 어떤 역사 기록보다도 입체적으로 기록한 전쟁일기이기도 하지만 이순신 자신의 인간적인 고뇌와 일상이 적힌 기록이기도 하다.


1)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순신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일기 곳곳에 이순신이 자신의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느껴지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그는 어머니의 안부를 늘 걱정하였으며, 자신의 아내와 자식에 대해서도 그리워하고 근심하였다. 『난중일기』는 일기의 첫 장부터 가족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1592년 1월 1일)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菶, 맏아들 회薈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가눌 수 없다. 병사의 군관 이경신이 병사兵使의 편지와 설 선물, 그리고 장전, 편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1592년 1월 1일 설날 이순신은 지방에 부임하여 어머니와 떨어져 2번째 맞는 설을 안타까워하고 한탄했다. 그의 처지는 39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신의 두 형도 먼저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로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고, 당시 고령이었던 어머니의 안부를 늘 걱정했다.


初四日丁巳, 晴, 是辰乃天只生辰, 而以此能討截, 未能往獻壽杯, 平生之恨也.(후략)
(1593년 5월 4일) 맑음. 오늘이 어머님의 생신이었으나 이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祝壽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후략)
(1594년 7월 15일) (중략)조카 분芬의 편지를 통해, 또 아산 고향의 선산이 아무 탈 없고 가묘家廟도 평안하고, 어머니께서도 평안하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이다.(후략)
(1596년 8월 12일) 맑으나 동풍이 크게 불었다. 동쪽으로 가는 배가 도저히 오갈 수가 없었으니 오랫동안 어머니의 안부를 듣지 못하여 매우 걱정이 되었다.(후략)


위의 일기에서 보는 것처럼 이순신은 어머니의 안부를 걱정하여 자식이나 사령을 통해 수시로 어머니의 소식을 들었다. 5월 4일의 일기를 보면 그날은 이순신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하지만 전쟁 상황이라 찾아가지 못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그 심정을 “평생의 한(平生之恨也).”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이순신은 어머니께서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매우 기뻐하였고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다행다행이다(多幸多幸).”, “기쁘고 다행이 다(喜幸喜幸).”, “매우 기쁘고 다행이다(喜幸萬萬).”, “기쁘고 다행함이 그지없다(喜幸何極).” 등으로 일기에 표현하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소식이 늦어져 어머니에 대한 안부를 듣지 못하게 되면 초조함에 전전긍긍하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정유년(1597)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게 된다. 그때의 슬픈 심정이 일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1597년 4월 13일) (중략) 얼마 후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고했다.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蟹巖(아산 인주 해암리)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면서 가슴 찢어지는 비통함을 모두 적을 수가 없었다. (후략)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하늘이 어두워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장례를 제대로 치를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이라 임지로 떠나야 했다.

이순신은 그때의 비통한 심정을 4월 16일 일기에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울부짖으며 곡을 하였다. 오직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고스란히 적었다. 이후 5월 5일의 일기에는 어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순신은 자신의 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한결같이 칭하였다. ‘천지’는 시경詩經 백주柏舟에 “어머니는 하늘이시다母也天只”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는 이순신이 어머니를 하늘처럼 생각하고 사랑했던 그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후대에 『난중일기』를 읽은 정약용은 이순신의 어머니를 향한 효성스러움에 대해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함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라고 평가하였다. 이 평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이순신의 마음은 그가 직접 쓴 일기를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가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식, 조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을 향한 그의 자상함과 책임감을 보여주는 일화가 『이충무공전서』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순신은 자신의 두 형이 처와 자식들을 남기고 일찍 죽자 어린 조카들을 거둬 키웠다.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부임하였을 때, 조카들도 전부 데리고 갔는데 남솔濫率(수령守令이 가속家屬을 제한 이상으로 데려가는 것)이라 하여 주변에서 비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주변에 비난에도 굴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내가 남솔의 죄를 얻을지언정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을 차마 버릴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이들을 끝까지 보살폈다.
이러한 이순신의 가족을 향한 애틋함은 일기 곳곳에 보인다.


(1596년 5월 6일) (중략) (아들) 울蔚과 김대복이 배를 함께 타고 나갔다. 비가 크게 쏟아졌는데 잘 갔는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앉아서 걱정했다.
初四日己亥, 晴而東風大吹. 薈與葂莞等, 以夫人辰日獻盃事出去.(중략) 晩坐樓, 目送兒等, 不覺觸傷.(후략)
(1596년 8월 4일) 맑았으나 동풍이 크게 불었다. 아들 회薈가 면葂, 조카 완莞등과 함께 아내의 생일에 헌수잔獻盃을 올릴 일로 떠나갔다. (중략) 늦게 누대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느라 몸 상하는 줄도 몰랐다.(후략)


이순신은 전쟁 기간에 아들과 조카들을 항상 자신의 곁에 두었다. 이들은 본가인 아산이나 관청, 본영 등을 이동하며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고, 소식을 전하였는데, 이순신은 이들이 오갈 때마다 무사함을 기원하였고, 만일 날씨가 안 좋으면 밤새도록 걱정하였다. 그들과 헤어질 때는 아쉬움에 몸이 상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가는 길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1594년 8월 30일) (중략) 이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 없다.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후략)
(1594년 9월 1일) 맑음.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들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속세에 돌아오는 것 같다(如僧還俗).”라고 하였다. 다시 쳤더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괘를 얻었다. 매우 길하다.(후략)
(1594년 7월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葂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되어 척자점擲字占을 치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如見君王).”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하다. 다시 쳐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如夜得燈).”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후략)


또한 그는 가족들이 병에 걸려 위중하다는 소식이 전해오면 걱정하며 마음 아파했다. 걱정되는 마음에 밤잠을 설치고 가족의 병세를 점치기도 했다. 첫 번째 점괘가 좋았음에도 걱정되는 마음에 또다시 점을 쳐서 결과가 좋게 나오자 그때서야 비로소 안도하였다. 그러다 가족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더없이 기뻐하기도 하였다.


十四日辛未, 晴. 四更, 夢余騎馬行丘上, 馬失足落川中, 而不蹶, 末豚葂似有扶抱之形而覺, 不知是何兆耶. (중략) 夕有人, 自天安來傳家書, 未開封, 骨肉先動, 心氣慌亂, 粗展初封見䓲書, 則外面書慟哭二字, 心知葂戰死, 不覺墮膽, 失聲痛哭痛哭, 天何不仁如是耶. 肝膽焚裂焚裂. 我死汝生, 理之常也, 汝死我生, 何理之乖也, 天地昏黑, 白日變色, 哀我小子. 棄我何歸. 英氣秀脫凡, 天不留世耶, 余之造罪, 禍及汝身耶. 今我在世, 竟將何依. 欲死從汝, 地下同勢同哭, 汝兄妹汝母, 亦無所依, 姑忍延命, 心死形存, 號慟而已. 號慟而已. 度夜如年. 度夜如年.(후략)
(1597년 10월 14일) 맑음.
사경四更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막내아들 면葂이 붙잡고 안은 형상이 있는 듯하다가 깨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중략)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아직 봉함을 열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해지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䓲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마음으로 면이 전사하였음을 알게 되어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처럼 인지하지 못한 것인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하여 이치에 어긋난 것인가. 천지가 어둡고 밝은 해조차도 빛이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인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서 끝내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도 역시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마음이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 년 같다. (후략)


위의 일기는 이순신의 셋째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날, 그가 쓴 일기이다.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葂은 명량해전이 이후 왜군에 의해 전사하였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 정유년(1597) 10월 14일의 일기는 이순신의 슬픔과 절망이 가장 크게 표출되는 순간이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비극적 상황이 우리에게 생생히 전달되고 있다.

이렇듯 이순신은 가족과 떨어져 그들을 돌보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했고, 가족의 안부에 희비가 교차했다. 그가 일기에 오롯이 담은 가족에 대해 애틋함은 그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자 한 가장이었음을 느껴지게 하고 있다.


2) 홀로 고뇌하는 이순신

『이충무공전서』「행장行狀」을 보면 이순신이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 나라에서 써주면 죽음으로 충성을 다할 것이요, 써주지 않으면 들에서 밭 가는 것으로도 족하다.”고 말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이순신이 가졌던 사명감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드러내 준다.

『이충무공전서』「행록行錄」을 보면,
공은 진중에 있으면서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매일 밤 잘 때도 띠를 풀지 않았으며, 겨우 1~2경을 자고 항상 사람들을 불러서 날이 샐 때까지 의논했다. 또 먹는 것은 아침저녁 5~6홉뿐이었다. 보는 사람들이 먹는 것은 적은데 일이 번거로움을 심히 걱정했다. 공의 정신은 다른 사람보다 배였으며, 때때로 손님과 더불어 밤중에 이르기까지 술을 마시고도 닭이 울면 반드시 초를 밝히고 홀로 일어나 앉아 혹은 문서를 보기도 하고 혹은 계책을 강론하였다.


이순신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군의 지휘관으로서 강한 책임감을 지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식사를 종종 거르거나, 잠잘 때 (허리)띠조차 풀지 않고 잘 정도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계책이나 전술을 고민하는 데 골몰하였다.

당시 이순신은 수군을 이끄는 최고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그에게 주어졌다. 자신의 결정에 수많은 사람과 나라의 운명이 달려있었기에 그는 늘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난중일기』에 적힌 “홀로 앉아 있었다(獨坐).” 또는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縮坐).”는 기록을 통해 고뇌하였던 이순신의 모습이 확인된다. 그는 홀로 앉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아래의 일기는 항상 전황을 살피고 전략을 구상하며 고민하였던 이순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593년 7월 1일) (중략)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고 홀로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후략)
(1594년 5월 20일) (중략) 온종일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었다. 호남의 방백方伯(이정암)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 같아 매우 한스럽다.
(1594년 9월 3일) (중략)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위태롭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후략)
(1594년 9월 28일) 흐림.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토벌할 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첫 번째 점은 “활이 화살을 얻은 것 같다(如弓得箭).”는 내용이었고, 두 번째 점은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如山不動).”는 내용이었다. (후략)


배의 뜸 아래에 혼자 앉아서 나랏일을 고심하기도 하였고, 5월 20일 일기에는 전라감사 이정암李廷馣이 조정에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온종일 혼자 앉아 근심하며 한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1594년 7월 12일에는 류성룡의 부음(사망 소식)이 순변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고, 홀로 빈집에 앉아 걱정하며 밤새 잠들지 못하였다. 9월 3일에는 초저녁에 촛불을 켜고 계책을 고민하는데 이렇다 할 방법을 나오지 않아 답답해하기도 했고, 장문포 해전을 앞둔 9월 28일에는 새벽에 홀로 앉아 생각하다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길한지를 점치기도 하였다.

이후의 일기에도 여전히 홀로 앉아 고뇌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상황이 매우 급하게 흘러가면서 이순신의 고뇌는 더욱더 깊어져만 갔다.

1597년 2월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거부한 죄로 파직되었고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어머니의 죽음까지 겪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순신에게 7월 18일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의 패전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의 일기에 이순신은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라고 자신의 비참했던 심경을 숨김없이 적었다. 하지만 그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현장을 수습하고 무너진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도원수 권율에게 요청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동분서주하였다.


(1597년 8월 2일) 잠시 갰다. 홀로 병영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랴 비통함이 그치지 않는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위의 일기는 정유년 8월 2일의 일기로 당시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암담했던 상황에서 이순신의 느꼈을 고뇌를 잘 보여준다. 칠천량에서 궤멸한 조선 수군은 그가 힘들게 만든 전력이었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전력이 무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수군 재건을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통한 심정은 지울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597년 9월 3일) 비가 뿌렸다. 배의 뜸 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생각이 어떠하겠는가?
(1597년 9월 12일) 종일 비가 뿌렸다. 배 뜸 아래에서 심회를 스스로 가눌 수가 없었다.


9월 3일 날씨는 비가 오고 있었다. 이순신은 비가 오는 날 배에서 머리를 웅크린 초라한 모습이었다. 열악한 상황에 군사들의 사기는 낮았고, 패배감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조차 이순신에게 수군을 포기하고 육전에 임하라 명하기도 하였다. 7월 22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지만, 이순신은 배 한 척 구하기 어려웠다. 이후 8월 18일 배설裵楔이 칠천량에서 가지고 도망간 배 12척을 겨우 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전날인 9월 2일에는 이순신에게 12척의 전함을 인계했던 배설이 도망갔다. 이순신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명량해전(9월 16일) 4일 전인 9월 12일의 일기에서도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견디며 홀로 고뇌하던 이순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가 오는 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강인한 영웅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포기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군을 포기하고 육전에 임하라는 명령에는 “지금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 12척이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고 거부하여 왜군에 맞서고자 했고,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처형했다. 명량해전 하루 전인 9월 15일에는 군사들 앞에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하여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맞섰다. 그 결과로 명량에서의 승리를 가져왔다.

이렇듯 이순신은 자신의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1592년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 『징비록』에는 ‘그가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전투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칼로 살을 찢고 탄환을 뽑았고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런 모습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면서 주위가 동요하지 않도록 “싸움이 급하니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고 말한 것과도 이어진다.
이처럼 『난중일기』 속 이순신은 자신의 어깨에 걸린 중압감에 홀로 고뇌하는 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눈앞에 닥친 어려움에 웅크리고 홀로 고뇌하는 모습은 그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병에 신음하는 이순신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자신의 건강에 관해 기술한 부분이 확인된다. 이순신은 전쟁 기간 내내 건강이 그리 좋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몸이 불편하다고 서술한 것은 대략 100회 정도에 이른다. “몸이 불편하였다(氣甚不平).”, “몸이 또 불편하였다(氣且不平).”, “몸이 크게 불편했다(氣大不平).”, “몸이 극히 불편했다(氣極不平).”라고 하여, 몸이 아픈 정도에 따라 표현을 달리해가며 일기에 적었다.

또 아픈 증상에 따라 “종일 신음했다(終日呻吟).”, “밤새 식은땀을 흘렸다(達夜虛汗).”, “한참 구토를 했다(嘔吐移時).”, “어두울 무렵 코피가 한되 남짓 흘렀다(昏鼻血流出升餘).” 등으로 상세히 서술하였다.

갑오년(1594) 이순신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해 1월부터 몸이 불편하다고 적은 일기가 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3월에는 6일부터 25일까지 내내 아프다가 27일에야 몸이 조금 나은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4월 25일부터 다시 아프기 시작해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병에 시달렸다.


(1594년 3월 7일) 맑음.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아랫사람을 시켜 패문에 대한 답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글 모양을 이루지 못했다. 원수사(원균)가 손의갑孫義甲을 시켜 지어 보내게 하였지만, 그 역시 매우 적합하지 못하였다. 나는 병중에도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정사립鄭思立에게 써서 보내게 했다. (후략)
(1594년 4월 25일) 맑음. 새벽부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고통스러웠다. 아침에 보성군수(안흥국)가 와서 만났다. 밤새도록 앉은 채 앓았다.
(1594년 4월 26일) 맑음. 통증이 매우 심하여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곤양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


당시 이순신은 진중에 돌았던 전염병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조정에 올린 장계를 보면 1594년 1월부터 전염병이 돌아 4월까지 사망자가 1,704명이고, 병에 신음하는 사람이 3,759명에 달했다. 이순신의 병력이 17,000명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병력 손실이었고, 전투에서 잃은 병력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병력이 손실되고 본인마저 병에 신음하면서도 지휘관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이충무공전서』「행록」에는 ‘위중하였지만, 오히려 하루도 눕지 않고 여전히 사무를 보았다고’ 하였고, 가족들이 쉬기를 청했지만 “장수가 죽지 않았으니 누울 수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일기에서도 이러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갑오년(1594) 3월 7일의 일기에는 부하에게 시킨 답서가 마음에 들지 않자 몸을 억지로 일으켜 처리하였고, 4월 25일과 26일의 일기에는 종일 통증에 시달리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관을 만나며 공무를 수행했다.
이순신은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온백원溫白元이란 약을 먹기도 했고, 침을 맞기도 했다. 병신년(1596)에는 목욕했다는 기록이 일기에 보여 이순신이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유년(1597) 이순신은 파직당해 서울로 압송당했고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이후 4월 1일에 석방되었는데 감옥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면서 많이 지친 상태였다. 그런데도 석방되자마자 피로를 풀 시간도 없이 백의종군하게 되었고,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정신적으로도 힘든 상황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몸이 불편해 고개도 내밀지 못했고, 이동하던 중에 몸이 불편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그대로 머물러 몸조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의 패전을 수습하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왜군이 언제 침입해올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다시 병에 신음해야만 했다. 정유년(1597) 8월 20일에 진영을 창사(해남)로 옮겼는데 이날부터 몸이 아파 먹지도 못하고 병에 신음하였다.


二十日戊寅, 晴. 浦口狹窄, 移陣于梨津下倉舍, 而氣甚不平, 廢食呻吟.
(1597년 8월 20일) 맑음. 포구가 좁아서 이진梨津 아래 창사倉舍(해남)로 진을 옮겼는데,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못하고 신음하였다.
二十一日己卯, 晴. 四更, 得霍亂, 而慮觸冷, 飮燒酒調治, 則不省人事, 幾至不救, 嘔吐十餘度, 達夜苦痛.
(1597년 8월 21일) 맑음. 사경四更에 곽란이 일어났다. 몸을 차게 한 것으로 생각하여 소주를 마시고 치료하려 했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구하지 못할 뻔했다. 구토를 10여 차례하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二十二日庚辰, 晴. 以霍亂不省人事, 下氣亦不通.
(1597년 8월 22일) 맑음.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하기下氣도 통하지 않았다.
二十三日辛巳, 晴. 病勢極危, 而船泊不便, 實非戰場, 下船宿于浦外.
(1597년 8월 23일) 맑음. 병세가 매우 위중해져서 배에 머무르기가 불편하였다. 실제 전쟁터가 아니기에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잤다.


이때 그는 곽란癨亂(더위를 먹거나 그 밖의 일로 심하게 토사하는 급성 위장염)이란 병에 시달렸다.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소주를 마셔 치료해보려 했지만, 역효과로 구토를 반복했고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다. 8월 23일에는 몸 상태가 매우 나빠져 배에서 내려 포구에서 신음하였다. 하지만 8월 28일 어란포와 9월 7일 벽파진에 소규모 왜선이 출현해 격퇴하는 등 당시의 상황은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1597년 9월 24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신음했다. 김홍원이 와서 만났다.
(1597년 9월 25일) 맑음. 이날 밤은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1597년 9월 26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명량해전의 승리 이후 이순신은 전선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여전히 왜군과 비교해 전력은 미흡했고, 수군을 재건하는 것이 시급했다. 이순신은 이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인지 다시 병에 시달렸다. 정유년(1597) 9월 24일 몸이 불편하여 신음하였고, 26일까지 3일간 식은땀이 온몸에 흐르고 나가지 못할 정도로 신음했다.

10월 19일에는 저녁에 코피가 나는데 한 되 정도 흘렀다고 적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유년의 이순신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지친 상태였다. 개인의 시련과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중압감에 병까지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이겨냈다. 그 결과로 기적 같은 승리를 가져와 전쟁의 판세를 뒤집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자신이 직접 쓴 감정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는 엄격한 상사이고, 강인한 장수였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고뇌하고 머리를 웅크리며 병에 신음하기도 하였다. 이순신이 일기에 적은 자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른지 않은 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