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Seungjeongwon Ilgi, 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다시 만든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승정원일기』 역시 16~17세기의 전란으로 인해 전기의 기록이 소실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도성의 궁궐에 화재가 발생해 실록, 사초, 『승정원일기』 등이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실록은 다행히 전주 사고에 보관한 것이 남아있어 이를 토대로 복원 작업을 시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는 애초에 한 부만 만들었기 때문에 복구가 쉽지 않았다. 1595년(선조 28)에 과거의 『승정원일기』를 다시 만드는 개수改修 작업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다만 1592년(선조 25) 이후의 일기만 복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1624년(인조 2) 발발한 이괄의 난으로 도성이 함락되면서 다시금 소실되었다.

그 이후로 부분 개수 작업을 진행하면서 『승정원일기』를 보전해가던 조선후기에 다시금 시련이 닥치게 된다. 1744년(영조 20) 10월 12일 밤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길은 삽시간에 번지며 승정원 일대를 모두 태워버렸다. 14일에 보고된 병조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창덕궁에서 승정원 건물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실수로 불을 냈다고 한다.

당시 승정원에는 1592년(선조 25)부터 1721년(경종 1)까지 총 1,796권의 『승정원일기』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 중 1710년(숙종 36) 4월과 1719년(숙종 45) 2월, 9월분을 제외한 1,793권이 전소되었다. 살아남은 세 권의 『승정원일기』는 진연進宴을 준비하기 위해 참고하려고 다른 기관에서 빌려갔던 덕분에 화를 면했다. 23일의 논의에서 행사직行司直 구택규具宅奎는 『승정원일기』를 놓아두었던 서고는 아래에 방이 있어 늘 연기와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모두 타버렸다고 한탄하면서 『승정원일기』를 안전하게 보관할 서고를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남아있는 『승정원일기』를 다른 건물에 옮겨두어 관리하는 것 대신, 불타버린 『승정원일기』를 다시 만드는 것을 선택했다. 이에 1746년(영조 22)부터 『승정원일기』 개수 작업이 시작되었다.

영조는 일기청日記廳을 설치하고 개수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1623년(인조 1)부터 1721년(경종 1)까지 100여 년의 『승정원일기』를 다시 만들어 내는 대대적인 사업이었다. 원래 승정원에서 『승정원일기』를 작성할 때에는 수 세기를 이어온 관행에 따라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별도의 지침서를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때의 개수 작업은 단기간에 대량의 서적을 통일된 형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데다 타 기관의 관원들도 투입되었기 때문에 범례를 정하게 되었다. 『일기청등록』에 실린 범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거조擧條(임금에게 아뢰는 조항)는 모두 기록한다.
② 각사各司의 초기草記는 후일에 참고 될 만한 것을 기록한다.
③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는 중요한 것이든 아니든 모두 기록한다.
④ 상소上疏, 입계入啓한 것은 대개를 기록한다.
⑤ 입계된 정사呈辭를 쓰고 세 번째 정사는 체차遞差되었을 경우만 쓴다.
⑥ 정사政事는 ‘정사가 있었다有政’라고 쓰되 낙점落點에 관한 내용만 쓴다.
⑦ 각전各殿에 대한 약방藥房, 조정朝廷, 정원定員, 옥당玉堂의 문안한 일은 쓴다.
⑧ 왕의 전교傳敎는 모두 쓴다.
⑨ 정사에 대해 여쭌 내용은 쓴다.
⑩ 사은謝恩, 하직下職 등을 쓴다.
⑪ 월초月初 대간의 계사가 전에 아뢴 계사인지 새로 아뢴 계사인지 모르면 지난달을 살펴보고서 쓴다.
⑫ 관상감觀象監에서 보고하는 재이災異에 관한 내용은 해당 날짜의 일기에 쓴다.
⑬ 조보朝報 가운데 이어移御(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한 날짜는 뽑아내어 별도로 기록하여 벽에 게시해 둔다.
⑭ 각도各道 서목書目과 어사회계御使回啓, 이조와 병조의 세초歲抄, 서용敍用 등을 쓴다.
⑮ 금부禁府 계목啓目 중 후일에 참고 될 만한 것은 쓴다.
⑯ 신여일기燼餘日記(화재 당시 타고 남은 일기)는 옮겨 베낀다.


이상의 범례를 통해 기존의 『승정원일기』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는지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국왕과 관련된 문서는 전부 베껴두어 언제든 참고할 수 있게 하였다. 『승정원일기』 작성 과정에서 과거의 일을 참고해야 할 경우 당시 일기를 꺼내어 살펴보았으며, 기상 기록은 관상감의 관측을 옮겨적었고 신료들의 인사·고과 관련 기록은 빠뜨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금의 거처와 관련된 기록은 중요하게 다룬 듯하다.

대량의 일기를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해 낸 방편 중 하나는 양식을 인쇄하여 사용하는 것이었다. 『승정원일기』는 매일의 기록을 일정한 순서대로 작성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포맷이 형성되곤 했다. 영조 연간에 새롭게 개수된 『승정원일기』 중 첫 번째 권의 내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섯 승지의 직함과 주서, 가주서假注書 등의 직함이 인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매번 같은 내용을 적으면서 하루 기록을 시작하게 되므로, 애초에 이들 글자를 인쇄한 종이를 사용해 품을 덜 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개수 작업이 지나고 『승정원일기』 작성이 다시금 정상적으로 진행되던 시점의 기록을 보면, 해당 부분을 수기로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개수된 『승정원일기』내지를 보면 본문이 시작되는 첫 줄에 ‘상재上在 궁宮’ 세 글자도 인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매번 반복되는 투식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어느 궁에 머물렀는지를 하루치 기사의 첫 번째 내용으로 적어둔 것이다. 국왕의 동정 파악이 승정원 업무와 밀접히 관련된 것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1년여간의 작업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 낸 과거 『승정원일기』는 총 548책이었다. 본래 기록보다 내용이 소략해졌지만, 기사마다 참고한 자료를 분명하게 적어두고 말미에는 작성자와 교정자의 성명을 기록해 책임을 부여했다.
고종 연간에 또 다른 화재가 발생하여 1851년(철종 2)부터 1888년(고종 25) 사이의 『승정원일기』가 다시금 불탔다. 이에 고종은 영조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소실된 『승정원일기』를 개수했다.

이처럼 조선은 『승정원일기』의 형태를 갖추고 국정 운영에 참고할 자료를 복원해내기 위해 개수 작업을 수차례 단행하였다. 엄중히 봉안된 실록에 비하여 『승정원일기』는 보관상 허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세조대부터 종잇값을 받기 위해 『승정원일기』를 몰래 훔쳐다 판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들이 『승정원일기』를 단 한 부씩만 만들고, 승정원이라는 공개된 장소에 보관하며, 자유로운 열람을 허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임금이라도 함부로 볼 수 없는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는 일단 승정원에 들어갈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쉽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영조가 사도세자 관련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남아있어 타인이 볼까 우려했던 것은, 국왕이 보여주기 꺼리는 기록일지라도 공적인 문서라면 공개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밀실 정치는 어려웠다. 임금의 목구멍과 같은 승정원의 존재는 거꾸로 만인의 눈이 되어 임금을 감시하는 소임을 수행하기도 했다. 기록유산으로서 『승정원일기』의 가치는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에야 더욱 높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