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Seungjeongwon Ilgi, 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승정원일기』의 특징은 무엇인가?
『승정원일기』는 조선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서 매일의 업무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한 일지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여타 관청에서도 일지를 작성하는 사례가 많았고, 연대기적 성격을 갖는 조선의 공식 기록물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 여러 자료가 있기에 『승정원일기』가 갖는 자료적 가치를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른 자료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방대한 분량에 주목할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288년 동안의 『승정원일기』는 총 38만 장 이상이다. 글자수를 헤아려보면 2억 4천1백만 자가 넘는다. 294년 동안 작성되었다는 중국 명나라의 실록이 1,600만 자 가량임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양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편찬된 여타 기록물과 비교해도 압도적이다.
500여 년 동안 작성된 실록의 총 글자수가 약 5,300만 자이고 151년간의 기록인 『일성록』은 약 6,000만 자를 담고 있다. 이토록 방대한 기록은 단순히 승정원의 업무량에 비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승정원일기』는 과거의 국정 운영 내용을 가장 상세하고 정확하게 담고 있어야 한다는 당대 조정의 기대와 요청이 투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내용 면에서도 『승정원일기』는 다른 자료와 확연히 구별된다. 특히 조선왕조실록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실록은 한 임금의 재위 동안 논의된 수많은 사안 가운데 중요한 것을 선별하여 간결하게 기록하였다. 반면 『승정원일기』는 녹취록에 가까울 정도로 자세하게 그 날의 조정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국왕의 말과 행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하들과의 대화 내용, 왕의 표정과 기분, 건강 상태 등에 대해 꼼꼼히 적어두었다.
실록은 찬수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견해가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친다. 편찬자의 사관史觀에 따라 참고할 자료를 취사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승정원일기』는 주관적 판단이 배제되고 객관적 사실을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특히 승정원에서 승지를 보좌하는 주서들이 실질적인 기록 활동을 했는데, 이 자리는 명예로운 청요직淸要職으로 여겨졌던 만큼 붓을 꺾을지언정 진실을 왜곡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주서들은 국정 운영 현장에 직접 참석하여 보고 들은 내용을 즉각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승정원일기』는 현장성을 지닌 자료라 할 수 있다. 실록은 사관史官의 해석이 첨가되는 반면 『승정원일기』는 사실 관계 정리에 주력했다.
무엇을 중점적으로 기록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실록과 『승정원일기』는 차이를 보인다. 영조대의 청계천 준설 사업처럼 국왕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추진했으나 당대에 사초史草를 기록한 사관史官이나 후대의 실록 편찬자들이 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을 경우에는, 『승정원일기』에 실린 무수한 관련 기록들이 실록에는 소략하게 다뤄지고 마는 경우가 있다.
반면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발생한 사안이나 국왕과 관련되지 않은 사건들은 『승정원일기』보다 실록에 훨씬 상세하게 실려있다. 전국 각지에서 관찰된 천재지변 기록 역시 일시에 각지의 기록을 수합해 종합적으로 서술한 실록에 주로 담겨있다.
자료의 관리와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승정원일기』는 실록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실록은 『승정원일기』와 같은 자료를 종합적으로 참고하며 작성한, 한 국왕의 국정 운영 기록의 완성본이자 최종 정리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사회에서 실록은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보존해야 할 유물이었다. 후대에 실록을 넘겨주기 위해 조선은 전국 각지의 험준한 산속에 사고史庫를 짓고 그 숫자만큼 실록을 간행하여 나누어 보관하였다.
만일의 사태로 실록이 훼손되거나 소실되더라도 다른 사고에 보관된 자료로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조선 전기의 실록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며 소실되었는데, 전주산의 사고에 보관해오던 것만 화를 면했다. 이후 이를 토대로 전기의 실록을 복원해 다시 여러 곳에 분산해 두었다.
반면 『승정원일기』는 단 한 부만 작성하였다. 방대한 분량을 감안했을 때, 여러 부수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는 보관이 아니라 활용을 위한 기록이었기 때문에 여러 부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승정원일기』는 언제든 꺼내서 펼쳐볼 수 있도록 궐내 승정원 건물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은 관련 용어와 의례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실록은 ‘봉안奉安’, 받들어 모신다고 표현하였다. 기록물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받들어 안치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승정원일기』는 ‘장치藏置’, 간직해 둔다고 표현했다. 활용하기 위해 보관해두는 기록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실록의 봉안은 절차에 따라 의식을 거행하며 이뤄진 반면, 『승정원일기』의 장치는 일상적으로 승정원의 누상고樓上庫에서 행해졌다.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을 담은 기록은 『실록청의궤實錄廳儀軌』처럼 ‘의궤儀軌’로 불렸으나 『승정원일기』를 개수改修한 내용에 관한 자료는 『개수일기등록改修日記謄錄』처럼 ‘등록謄錄’으로 구분되었다. 봉안된 실록은 바람을 쐬어주고 먼지를 털어내는 포쇄曝曬 작업을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출납出納 내역을 일일이 형지안形止案에 기록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는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활용을 위해 보관된 자료인 만큼 『승정원일기』는 일단 승정원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비교적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76년(영조 52)의 『영조실록英祖實錄』을 보면 당시 사도세자 관련 기록을 세초洗草하게 하면서, 특히 『승정원일기』는 ‘천인賤人’들도 다 보는 것이니 각별히 유의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마도 『승정원일기』를 살펴보는 데 특별히 엄격한 제한이나 절차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점차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을 사사로이 베껴가는 일이 흔해졌는데, 1783년(정조 7) 정조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고 관리에 신중을 기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승정원일기』는 곧 송나라 때의 일력日曆과 같은 체모體貌이다. 마땅히 비장秘藏해야 하고 누설되지 않도록 하기를 사초史草와 다름없이 엄격하게 해야 할 것인데, 근년近年 이래로는 한결같이 이서吏胥들의 손에 맡겨 두고 전연 착실하게 전수典守하지 않으니, 너무도 기주記注의 책임을 잃어버리고 있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제번하고 긴급하게 거행할 일이 있어 전례를 상고하는 경우 외에는 절대로 고견考見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고, 비록 혹여 고견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주서注書가 따로 책자 하나를 만들어 놓고,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승지 아무가 아무 일로 인하여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의 일기를 고찰해 보게 된 다음에, 주서 아무가 서고에 들어가 감독하였음을 조심해서 써 놓게 하여, 뒷날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에 보관하고 있는 자료지만 중요한 기록이니 관리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할 것을 당부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가치를 강조한 것은 정조만이 아니었다. 중종은 “대개 상고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승정원일기』를 상고해야” 한다고 언급했고 영조는 『승정원일기』가 실록보다 상세하여 선왕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모두 담겨있다고 보았다.
승정원의 승지들 역시 『승정원일기』의 중요성을 부각하는데 힘썼다. 1692년(숙종 18)에 우승지 심중양沈仲良은 『승정원일기』가 실록과 차이는 있으나 등한시할 문서와 비할 바는 아니라고 아뢰었고, 1724년(경종 4)에 행도승지 이만손李萬巽은 『승정원일기』는 실록과 비교하면 경중의 구분은 있지만 시정時政의 모든 것을 수록했기에 중요한 기록물이라 하였다.
1816년(순조 16) 승지 박종훈朴宗薰은 “우리 조정의 문헌은 『승정원일기』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사실을 두루 갖추고 국가의 제도를 근거로 하여 등록謄錄의 체體에다 역사의 용用까지 겸하였습니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일기』는 별도의 관리자를 특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했다. 1692년(숙종 18) 우승지 심중양의 발언에 따르면 방직房直이 『승정원일기』를 관리하지만 자료가 서고에 흩어져있고 임의로 출입하니 체계가 허술하다 하였다.
또한 책을 옮길 때는 빈 가마니에 담아 운반하여 자료의 중요성에 걸맞지 않을 뿐 아니라 훼손과 분실의 위험도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18세기 기록을 보면 2천여 권 정도의 『승정원일기』가 습기로 인해 훼손되었고, 그중 200권은 보수가 시급한 상태였다. 인력 부족과 관리 체계 미비로 인해 『승정원일기』는 중요도와 분량에 비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상시 훼손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19세기 순조 연간에는 『승정원일기』를 대대적으로 포쇄하고 상태를 조사하였다. 절반가량의 책은 좀먹은 상태였고 종이도 상해서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때는 당장 손봐야 할 것이 900권가량으로 파악되었다. 『승정원일기』의 훼손 정도가 점차 심각해지자, 이후로는 매년 한 번씩 포쇄하고 손상된 자료는 보수하며 작업 과정 전반을 주서가 감독하도록 하였다.